미하엘이라는 소년
- - -
반은 위벽을 찢어발기는 듯한 지독한 굶주림 때문이었고, 남은 반은 그 거대하고 축축한 집이라는 공간에 짙게 드리운 아버지의 그림자로부터 단 한 뼘이라도 도망치고 싶다는 처절한 발악이었다. 소년은 오늘도 도둑질을 하기 위해 얼어붙은 거리로 나섰다.
문득, 그 음습한 집구석 난로 옆에 덩그러니 처박아 두었던 낡은 축구공이 떠올랐다. 가죽은 사방이 헐어 실밥이 터져 나왔고, 때가 꼬질꼬질하게 탄 채 둥근 형태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것. 제 볼품없는 처지와 너무나도 닮아 있어 차마 외면할 수 없던,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동반자.
낡은 문을 열고 한 걸음 밖으로 밀려 나오자, 불과 몇 분 전까지 뺨을 후려치던 가학적인 폭력과 고함이 마치 전생의 일인 것처럼 아득하게 멀어졌다. 마트로 향하는 길목에는 언제나 검푸르고 깊은 강물을 품은 채, 기괴하게 뻗어 있는 크고 긴 다리를 건너야만 했다.
소년은 걸음을 멈추고 무심코 난간 너머의 심연을 내려다보았다.
아름다웠다. 이 시궁창 같은 현실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비현실적인 고요였다. 서슬 퍼런 강물은 제 찬란한 혈통을 자랑이라도 하듯 푸르스름한 색을 선명하게 뽐냈다. 그 위로 따스한 햇빛이 부서지며 금빛의 윤슬이 보석 조각처럼 잔인하게 일렁였다.
인간 대접조차 받지 못하고 매일 밤을 피로 얼룩질 바에는, 차라리 저 눈부신 물결 속에 스스로를 가라앉혀 영영 섞여버리는 것은 어떨까. 이 지독한 육신의 족쇄를 풀고 저 차가운 낙원 속으로 도망치는 것은 어떨까.
하지만 집에 두고 온, 상처투성이인 유일한 친구가 발목을 잡았다. 저 홀로만 이 지옥을 탈출해 아름다운 은빛 윤슬이 될 수는 없었다. 소년은 마트의 차가운 매대에서 물건을 훔쳐 주머니 깊숙이 쑤셔 넣으며, 소름 끼치도록 고요하게 결론을 내렸다.
‘가장 어두울 때, 그 애를 품에 안고 함께 가라앉자.‘
사방이 암전되면 이 더럽고 멍든 존재 따위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은 채 완벽하게 지워질 테니까.
그날 저녁의 폭압 역시 평소와 다름없이 잔인했다. 소년의 온몸은 가차 없이 부어올랐다. 전신이 사정없이 짓밟혀 본래의 살색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시퍼런 피멍이 겹겹이 쌓였고, 먼저 터진 상처를 가리려는 조잡한 반창고처럼 새로운 상처들이 짓물러갔다. 숨을 크게 들이쉴 때마다 갈비뼈 한 구석이 찌르는 듯 쓰라려 숨이 턱턱 막혔다.
소년은 거실에서 들려오는 거친 코골이, 아버지가 마침내 술에 취해 잠들 때까지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인 채 시간을 헤아렸다.
몇 시간의 영겁 같은 침묵이 흐른 뒤, 소년은 마침내 바람이 새어 나가는 낡은 축구공을 가슴에 꼭 안고 거리로 나섰다. 피와 진물로 퉁퉁 부어 터진 얼굴은 커다란 검은 후드 깊숙이 밀어 넣어 완전히 은폐한 채였다.
밤의 강은 낮에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매혹적이었고, 지독하게 아늑해 보였다. 소년은 홀린 듯 다리 난간의 턱 위로 위태롭게 한쪽 발을 올렸다. 그러나 막상 까마득한 허공과 마주하자, 부러진 뼈마디가 사정없이 비명을 지르며 다리가 덜덜 떨려왔다. 소년은 두 눈을 더 꼭 감았다. 이 추락의 끝에서, 나를 괴롭히던 모든 감각이 영원히 마비될 때까지.
소년이 마침내 지상에서의 마지막 발을 떼고, 하염없는 추락의 심연으로 몸을 던지려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바스락.
살면서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가늘고 예사롭지 않은 온기가 소년의 거칠고 터진 작은 손목을 부서질 듯 강하게 낚아채 뒤로 잡아당겼다.
“……윽!”
화들짝 놀란 소년은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 위로 거칠게 나뒹굴자마자, 본능적으로 축구공을 가슴에 안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세상이 제게서 빼앗아 가지 못한 유일한 구원을 지키려는 처절한 방어 기제였다.
사르륵거리는 고급스러운 옷자락 소리와 함께 웅크린 소년의 시야 안으로 낯선 여인의 실루엣이 들어왔다. 은은하고 달콤한 향수 냄새, 정갈하고 부드러운 살결, 좋은 환경에서 사랑받으며 자랐음을 증명하는 여린 손과 부유한 귀족들이나 입을 법한 사복 의상.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언성을 높이더니, 소년의 눈높이에 맞춰 조심스럽게 허리를 굽혔다.
“꼬마야……! 거기서 대체 뭐 하는 거니? 부모님은, 부모님은 어디 계셔?”
소년은 자신과 완전히 상반된 궤도에 살고 있는 인간이 제 때 묻고 거친 손을 쥐고 있다는 이질감에 뇌리가 마비되는 것 같았다. 부모를 묻는 질문에 집이라는 공간에 존재하는 악마 같은 아버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 몸이 잘게 떨렸다. 하지만 그 끔찍한 학대의 실체를 고귀한 여인 앞에서 감히 입 밖으로 꺼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응? 꼬마야, 다쳐서 그래? 네 이름이라도 알려줄래?”
이름을 재촉하는 낯설고 다정한 숨결에 소년은 갈등했다. 한 손으로 품 안의 축구공을 부서져라 꽉 쥐며, 엉망진창으로 부어오른 얼굴을 숨기려 고개를 가슴팍에 묻었다. 아주 낮고 갈라진 목소리가 후드 틈새로 겨우 새어 나왔다.
“……미하엘.”
“미하엘?”
“……미하엘…… 카이저.“
여인은 소년의 성을 가만히 읊조리더니, 이내 서글프면서도 따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음, 황제(Kaiser)라니, 참 근사하고 예쁜 이름이구나. 일단 미하엘, 우리 추우니까 어디 좀 앉아서 얘기할까?”
그 생경한 다정함이 너무나 무거워, 소년의 시린 푸른 눈동자가 갈 곳을 잃은 채 하염없이 흔들리고 있었다.